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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파격적인 스캔들을 일으킨 그녀 '어우동'여자 이야기 2023. 6. 27. 00:10반응형
왕실 종친의 아내
어우동은 지승문원사 박윤창의 딸이자 집안이 부유하고 용모도 아리따워 일등 신붓감이자 효령대군의 손자 이동의 처였다. 효령대군 가문은 임금과 가까운 인척이고 명망이 높았따. 잘나가는 종친과의 결혼으로 박씨 부인은 정4품 혜인(惠人)에 봉작되며 귀하신 몸이 됐다. 하지만 부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 이동이 기생과 사람에 빠진 것이다.
아내를 버리다.
이동은 아내를 쫒아내기로 마음 먹고 그녀의 허물을 들추게 된다. 이동이 들춘 아내의 허물은 낮뜨거운 것이었다. 어느 날 박씨 부인이 젊고 훤칠한 장인(匠人)을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들게 했다고 한다. 남편이 출타하면 계집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장인의 옆에서 앉아 노닥거리며 그릇 만드는 솜씨를 칭찬하면 친근하게 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부인은 장인을 유혹해 내실로 끌어들이고 음탕한 짓을 벌였다. 음탄한 짓은 칠거지악(七去之惡) 중에 하나였기에 남편이 아내를 버리기에 충분한 사유였다.
이동과 성종
1476년 9월 5일 종부시(종부시 : 왕실 족보를 관리하면서 종친의 허물을 살피는 기관)에서 성종 임금에게 아뢰어 효령대군의 손자 이동을 탄핵한다. 탄핵 사유는 이동이 기생첩에게 푹 빠져 아내 박씨를 버렸다는 것. 성종은 종부시의 탄핵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해 20세가 된 성종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 이제 막 친정(親政)에 나설 때였고 종친들의 지원 사격이 절실했다. 종부시의 탄핵은 힘을 잃었다. 소박맞은 여인만 불쌍하게 된 것이다. 소박과 이혼은 달랐다. 사실상 남편과 헤어졌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아내였다. 새 인생을 살 수도, 부부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우동이 되다
'이혼녀 아닌 이혼녀'가 된 부인은 길가에 집을 얻고 몸종과 함께 행인들을 품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더니 여종을 꽃단장해 거리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충성스러운 종은 잘생긴 청년을 유혹해 집에 데려왔다. 박씨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꽃 피고 밝은 저녁이면 변장하고 몸종과 함께 도성 안을 돌아다녔다. 몰래 어울려서 통하고 새벽에 돌어왔다.
이윽고 화류계에 은밀한 소문이 퍼졌지만, 정체는 숨겼다. 별명을 사용하고 기생, 내금위 무관의 첩, 과부로 행세했다. 간통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별명이었던 어우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이 된다.
태강수 이난
어우동은 마침내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방산수 이난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물의를 일으켰다. 이난은 젊고 호탕한 종친으로 박씨와 부부처럼 지냈다. 빙산수 이난은 세종의 서손자였다. 태강수 이동과는 육촌 형제간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수를 건드린 것이다. 다른 집안도 아닌 왕가에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이 벌어졌다. 이 불륜극이 옥사(獄事)의 방아쇠를 당겼다.
어우동의 남자들
어우동은 곧 감옥에 갇혔다. 그녀의 입에서 정을 통한 간부(姦夫)들의 이름이 술술 나왔다. 장안의 호색한들이 굴비 엮듯이 끌려왔다. 무려 수십 명이었다. 그녀는 지체 높은 종친의 아내였지만 남자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왕족·대신·유생·서리·양인·노비가 그녀의 치마 속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어우동의 남자들은 의금부·형조·한성부로 나뉘어 심문을 당했다. 종친 수산수 이기는 단오날 그네뛰기 구경을 하는 박씨에게 접근해 정을 통했다. 춘양군(효령대군 손자)의 사위 이승언은 길을 기나가는 어우동을 보고 집까지 따라가 기어코 동침했다. 옆집 살던 내금위 구전은 박씨가 정원에 나오자 담을 뛰어넘어 간통했다. 그들은 어우동을 탐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간통한 남자는 대부분 어우동이 기생·첩·과부인 줄 알았다며 발뺌하기 바빴다. 그들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곤장 맞고 유배를 가는 등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사내들은 1~2년 안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복귀했다. 애초 간통을 입증할 수 없다며 죄를 면한 자들도 수두룩했다.
본보기가 된 어우동
1480년 9월 2일 의금부에서는 그녀에게 적용할 형벌이 곤장 100대와 유배 2000리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도승지 김계창 등 사림 관료들은 극형을 주장했다. 어우동이 종친의 아내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음탕한 짓을 저질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겼다는 것이다.
어우동은 군기감 앞에서 처형됐다. 음행의 본보기로 목 매달린 것이다. 성리학은 정욕을 억누르고 절의를 추구했다. 성종은 [경국대전] 편찬을 마무리하고 유교 통치 체제를 완성하고자 했다. 절의를 숭상하는 유교 구범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려면 정욕의 화신 어우동을 엄히 징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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