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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으면 안되는 역사 '제주 4.3 사건' 01역사 이야기 2023. 4. 7. 19:09반응형
1947년 3월 1일
1947년 3월 1일, 제주의 북초등학교에서 3.1절을 기념하는 집회가 열렸다.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이었기 때문에 전도적인 기념행사가 되면서 제주 전역에서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들었다. 3.1절 행사가 오후 2시에 끝나자 군중들은 곧바로 가두시위에 나섰는데 이 때 관덕정 부근에 있던 기마 경찰의 말발굽에 어린 아이가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기마 경찰은 다친 어린이를 그대로 두고 지나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무장경찰은 군중에게 발포하게 된다. 구경나온 민간인 6명이 사망하였고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15세 국민학생과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은 채 피살된 여인도 있었다.
제주도민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부를 세우려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대립하는 가운데에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한반도 남쪽을 미군이 통치하는 미군정이 실시되었고, 미군정은 친일파 경찰을 이용하자 제주도민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극심한 가뭄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전염병까지 돌아 힘겨운 생활이 계속되면서 도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사건의 발화점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에 반대하는 반경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고, 그 결과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파업'에 동참한다. 소요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카스티어 대령이 인솔하는 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의 발포에 대한 과오를 다스리기보다는 남로당의 정치선동으로 규정하여 소요사태를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였다.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미군정수뇌부 전원을 외지인으로 교체하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당의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게 된다.
서북청년단
서북청년회는 해방 뒤 월남한 서북 지방 청년들을 중심으로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된 극우반공단체이다. 이들은 주로 지주, 기독교계 인사, 민족조의자나 일부 친일파 등 북한의 탄압을 피해 도망온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강령으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의 전취, 균등사회의 건설, 세계평화에 공헌 등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들이 주로 한 일은 좌익세력에 대한 '백색테러'였다.
빨갱이 사냥(Red Hunt)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하여 총파업에 강경대응하였다. 3월 19일 담화문을 통해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 였으며 3.1절 집회가와 총파업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하여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 하였다.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되었으며, 3월 15일부터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한다. 3.1발포 사건 이후 1948년 제주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검속되었고, 이것은 'Red Hunt' 빨갱이 사냥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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