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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으면 안되는 역사 '제주 4.3 사건' 02 : 4.3사건의 발발역사 이야기 2023. 4. 26. 17:31반응형
나라의 분단을 막고 싶었던 사람들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반도가 영구히 남과 북으로 분단됨을 막고자 했다. 이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다. 이런 정치 흐름 속에서 남조선당(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948년 2월7일 전국을 총파업으로 몰로 간 2.7사건이었다.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궤멸상태에 빠졌다.전도적으로 검거 바람이 불었고, 붙잡힌 청년들에 대한 가혹한 조취가 이루어졌다. 궁지에 몰린 제주도 좌익진영은 결사항쟁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여러 번에 걸핀 비밀회의 끝에 결창과 서청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4.3봉기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4.3사건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여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미군정청은 4.3사건이 발생하자 4월5일 경찰 100여명을 제주로 급파하는 동시에 서청 단원들도 증원되었다. 미군정은 4월 17일 그동안 관망 상태에 있었던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게 사태 진압을 명령하지만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투표 거부는 빨갱이
처음에는 평화협상이 체결되어 전투를 72시간 이내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양측은 강경 일변도의 진압정책과 방화사건 등으로 합의가 파기되면서 사태가 악화되었다. 선거일이 가까워지면서 선거관리사무소가 습격을 당하고 선관위원들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연이여 일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고, 다음날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고, 6월 18일 경비대 연대장이 대령 진급 축하연을 마친 후 중위 등 모 부사관 등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했다.
계엄령
8월15일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다음ㄷ달 9일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문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한라산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려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되었고, 중간간마을에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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