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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잊으면 안되는 역사 '제주 4.3 사건' 03 : 초토화작전역사 이야기 2023. 6. 8. 07:00반응형
해안선으로부터 5KM
10월 11일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해안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대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이때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했다. 11월 17일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 시킨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중산간 지대뿐만 아니라 소개령에 의해 해안 마을로 내려간 주민들까지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폭도라 지목당하는 것만으로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초토화작전
'초토화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양민 학살이 행해졌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소개(疏開)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 마을을 불태웠다.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을 마을을 떠나지 못하소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소개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사람이 남아 있던 마을도 방화와 학살이 이루어졌다.
왜 중산간이었나?
5.10선거를 반대하는 무장대가 주로 산간지대와 중산간마을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토벌대는 중산간마을을 적성지대로 간주했고 주민들 가운데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되자 아예 모두 죽여 버리는 잔인한 방법을 택했다. 중산간마을은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졌다. 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 2만 명 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의 일원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산에 내려오면 살려주겠다.
토벌대는 선무공작, 즉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고 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피난민들이 나뭇가지에 흰 옷을 매어 만든 백기를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온 주민들 대부분은 주정공장 등 수용소에 수개월 동안 감금된 채 철저히 심문을 받았다. 그 사이 오랜 피난생활의 후유증으로 병들어 죽기도 했고 비참한 집단 수용소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
당초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고 했지만, 주민들은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이 군법회의는 법이 정한 최소한의 절차도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것이었고, 젋은 남자들은 대부분 사형, 무기형, 15년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울 수 없는 상처
4.3사건은 제주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9인 2만5천 ~ 3만 명의 인명이 집단적으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정신적 피해도 컸다. 특히 서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던 전통적인 제주공동체가 철저히 파괴됐다. 정부조직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위원회에 공식 희생자만해도 1만5천여 명에 이른다. 이중 83%는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고 어린이, 노인, 여성 등 노약자의 희생이 무려 33%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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