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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건
    역사 이야기 2022. 3. 30.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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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namu.wiki/w/%EC%84%9C%ED%95%B4%ED%9B%BC%EB%A6%AC%ED%98%B8%20%EC%B9%A8%EB%AA%B0%20%EC%82%AC%EA%B3%A0

     

    1993년 10월 10일

     '서해훼리호'는 낙도보조항로를 운항하는 여객선으로 위도와 육지를 하루에 한 번씩 오가는 유일한 여객선이었다. 이 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 사람들은 큰 배였던 '서해훼리호'로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고, 궃은 날씨 탓에 배가 심하게 출렁리면 가득 찬 승객과 짐으로 난장판이 됐다. 잠시 후 프로펠러에 바다에 떠 있던 로프가 감겨 바다 한가운데서 멈추게 된 배는 급속도로 기울었다. 커다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https://kiss7.tistory.com/2514

     

    침몰의 원인

     해당 사고는 과적과 정원초과에 따른 선박의 복원력 상실, 사고 순간의 파도 각도, 선박의 배수불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 배에는 정원을 초과한 승선 인원 외에도 멸치액젓 9톤, 자갈 7.3톤 등 16.3톤의 물품이 적재돼 있었는데, 이것은 최대 적재 기준보다 10톤 가까이 초과된 중량이었다.

     서해훼리호의 실제 적재 능력은 6.5톤에 불과했지만, 법적으론 40톤까지 실을 수 있게끔 허용되어 있었다. 안전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적재량을 부실하게 관리했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35185.html

     

    주민들의 요구

     당시 사고가 발생했던 위도는 80년대 후반부터 바다낚시로 인기가 높아지면서 전국에서 몰려든 낚시꾼들로 몸살을 앓는 중이었다. 특히 주말이면 300~400여 명이 찾아오곤 했다. 이에 1일 1회로 운항 횟수가 제한된 서해훼리호는 매번 정원 200명이란 규정을 어긴 채 운항해야 했다. 위기를 느긴 주민들은 당국에 운항 증편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부당했다. 부안과 위도를 오가는 항로는 국가보조금을 지원받아 운영되는 적자항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해훼리호의 무리한 운항은 이어졌다.

     

    http://sagunin.com/18445

     

    무책임한 언론사

     전 국민이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당시 한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 언론사 기자는 서해훼리호의 선장·갑판장·갑판원을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하며 생존설을 보도했다. 나아가 이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했다거나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추측성 보도도 쏟아냈다. 이에 검찰·경찰은 선원들을 지명수배하고 위도 인근을 대대적으로 수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장과 승무원들은 사고 발생 5일 만에 무선통신실 안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들은 침몰 당시 끝까지 구조요청을 하다가 최후를 맞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섣부른 보도로 인해 피해 복구 작업에 혼선을 빚었고, 고인들까지 두 번 죽인 셈이 됐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101018414093358

     

    침몰 그 후

     사고 책임을 물어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이 전격 해임됐고, 관계 공무원 38명이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다. 서해훼리호의 정기점사 서류를 허위작성한 군산해운항만청 공무원 4명과 선박회사 상무 등은 구속 기소됐으나, 법원의 집행유예 선고로 모두 풀려났다. 결국 3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대형 인재사고로 구속되어 실형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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