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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02 : 일본의 조선인 학살역사 이야기 2022. 4. 29. 07:00반응형
조선인 학살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군경과 민간인에게 학살당하는 만행이 벌어졌다. 이 때 학살당한 조선인 수룰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자료마다 학살자수는 다른데 일본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수는 발표된 사망자 수 중 가장 적은 233명이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간지인 『독립신문』 에 발표된 학살자 수는 6,661명에 이른다. 사건 후 조선인들이 1923년 10월 '재일본 관동지방 이재조선동포 위문반'을 조직하여 11월까지 사망자 수를 조사하였으나 일본 정부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재난을 당한 조선인들은 구조를 기다리다가 또는 안전한 곳을 찾아다가 만난 경찰과 일본 민중에 의하여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다.
왜 조선인이었을까?
일본은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경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 내외의 민족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즈음에 재일조선인의 수는 증가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바탕으로 조선 민족이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에 있었을까?
1차 세계대전 중에 유럽 국가들이 생산을 중단하자 일본의 공산품에 대한 해외 수요가 증가하였고 일본 자본주의는 급격히 발전하였으며 일본 자본가들은 값싼 임금으로 고용이 가능하고 다루기 쉬운 조선인들을 모집해갔다.전후 불황 중에도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일본의 자본가들은 저임금으로 불황을 타개하고자 하였고,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은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조선인의 조선 외 이동을 어렵게 하던 '여행증명서제도'가 폐지되어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이 용이해지면서 재일조선인 증가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노동자를 대체함에 따라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고 이는 일본 민중이 조선인을 학살하는 원인이 되었다.
학살 그 이후
일본 정부는 학살 후 조선인 폭동을 오히려 기정사실화 하였고 불령선인들이 있어서 조선인 학살은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하였다. 그리고 학살에 대한 국제적 시선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을 학살한 일부 자경단원에 대한 형식적인 재판을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경단에 대한 면죄를 주장하기 위해 결성된 '관동자경동맹' 등의 단체와 극우단체인 흑룡회가 활동하였다. 관동자경동맹은 국가가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조선인 학살에 민중을 동원한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자경단원들이 국가를 위해 학살을 저질렀다며 '자경단의 과실에 대한 상해죄는 전면 면죄할 것. 자경단의 과실에 의한 살인죄는 전부 예외적인 은전(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혜택)을 적용해 판결할 것. 자경단 중 공로자들을 표창하고 특히 경비를 위해 목숨을 잃은 자들의 유족에 대한 적절한 위로의 방법을 강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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