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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 돌아온 것이 죄가 된 여자들 '환향녀'
    여자 이야기 2021. 5. 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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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여자의 정절

     조선은 개국과 함께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을 폈다.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데 안성맞춤인 통치 이념일 뿐 아니라,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었다.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를 다해야 한다. 그 연장선에서 여자도 남자에게 복종해야 했다.

     조선시대 여성이 지켜야 할 최고의 도리는 정절이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의 정절을 강요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조선처럼 국가가 그것을 통제한 경우는 드물었다.

     

    병자호란, 청나라로 끌려간 여자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대청'으로 변경하며 국력을 키워나갔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조선에 대청을 형제의 나라가 아닌, 명나라처럼 군신의 나라로 고쳐 대하고, 황금과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결사 항전의 의지를 굳히고 이 요구를 묵살했다. 그러자 1636년 12월, 홍타이지는 12만 대국을 직접 이끌고 조선 정벌에 나섰다. 이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청 태종은 승리한 뒤, 전 군대에 포로를 50만 이상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청의 각 부대는 목표를 채우기 위해 조직적인 사냥에 나서게 되는데, 청군이 선호한 것은 젊은 여인들이었다.

     

    포로가 된 여인들의 삶

     여인들이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여인들은 성적 노리개로 전락했고 항거하면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첩이나 창부로 팔려간 여인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죄책감에 빠졌다.

     1645년 3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잡힌지 9년 만에 쉬국하면서 청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기 시작한다. 속환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10년 동안 조선에 환속한 여인은 2만 5000명에서 5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20만 명에 이르는 여성 중 3분의 2 이상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국가의 골칫거리가 된 환향녀

     며느리, 아내, 누이를 맞이하는 조선 남자들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듯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법인데, 그녀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지 않았다. 조선의 예법을 어겼으나 자신들의 잘못으로 희생당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혼을 원하는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고 평민들은 환속한 아내와 며느리를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환향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었다. 이는 본래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의미였으나, 오랑캐와 잠자리를 한 더러운 여자라는 악의적인 뜻으로 회자되었다. 정절을 잃지 않은 여자들도 환향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환향녀의 삶

     우물에 몸을 던지고, 시댁과 친정이 보이는 동구 밖 큰 나무에 목을 맨 환향녀들이 즐비했다. 이혼당하지 않고 별당에서 홀로 쓸쓸히 지내던 여인들은 방 천장에 명주실을 내리거나 은장도로 손목을 긋고 가슴을 찔렀다. 아예 집 안에 들어갈 수조차 없는 여인들은 강 깊은 곳에 몸을 던졌다. 오랑캐에게 끌려갈 때 자결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고, 조선의 남정네들을 원망하면서 눈을 뜬 채 이승을 떠났다.

     차마 죽을 용기가 없는 환향녀들은 어디론가 떠났다. 다른 남자와 도주하거나, 유객에 머물며 환향녀라는 신분을 감추고 술과 몸을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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