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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참정권의 역사여자 이야기 2021. 6. 4. 06:00반응형
여성 참정권을 위한 투쟁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개개인의 정치적 소견을 종이 한 장으로 표현하여 거대한 정치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선거.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선거란 원하든 원치 않든 누구에게나 주어진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지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에 가끔은 가볍게 여겨지기도 한다. 보통 · 평등 · 비밀 · 직접 선거의 4원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러한 선거의 4원칙을 보장하는 참정권의 역사는, 채 150여 년이 되지 않는다. 평등한 참정권을 얻기 위해 인류는 지난 세기 동안 무수한 피와 투쟁의 역사를 치러 냈다. 그중에서 여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한 투쟁은 그 어떤 참정권 투쟁보다 길고 지루했으며 과격했다.
과격할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시위
1912년 3월 영국 런던의 중심가 피카딜리 거리를 비롯한 주요한 거리에 위치한 건물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박살이 났다.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던 2백여 명의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벌인 일이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 WSPU-Women's Social and Political Union, 여성사회정치동맹-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주요한 건물의 유리를 깨며 주장한 것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위한 권리 획득, 즉 참정권 획득이었다.
WSPU의 참정권 운동은 10여 년째 계속되었지만 영국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울분에 찬 여성들은 점점 더 과격하고 파괴적으로 변해 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사회에 알리고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지 않는 입법부에 경고를 보내기 위해 폭력 운동을 택했고 공공 시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영국과 영국의 남자들의 모든 삶을 불안하고 위험하게 만들어 참정권에 대한 여성들의 요구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리는 데 있었다.
여자에게 참정권을 줄 수 없었던 남자들
빅토리아 시대, 의회 민주주의의 효시이며 꽃이라고 불린 영국 정부의 민주주의는 남성들, 그것도 돈이 있는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초기 참정권은 일정한 금액 이상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자산가 남성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후 영국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몇 차례 법 개정을 통해 참정권을 확대해 갔지만 그때마다 언제나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자는 주장은 무시되곤 했다.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여성의 참정권을 꾸준히 의회에 상정하였지만 매번 부결되었다. 참지 못한 여성들은 이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국 정부의 합법이란 것은 여성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획득한 여성 참정권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 정부는 인민 대표법을 성립시켜 마침내 여성들의 정치 참여를 허용하였다. 이 참정권의 획득은 전쟁 기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한 여성들의 공과 무시할 수 없게 성장한 여성들의 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3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주어진 불완전 선거권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남성들이 많이 사망하여 여성에게 남성과 똑같은 참정권을 부여할 경우 여성에 비해 남성들의 수가 적어 남성이 정치적으로 불리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28년 인민 대표법은 남녀 동일하게 21세부터 선거권을 갖도록 개정되었다. 마침내 영국 여성들은 남성들과 똑같은 완전 평등 참정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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