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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거상 김만덕'여자 이야기 2021. 6. 5. 06:00반응형
불행했던 유년기
만덕의 유년기는 불행의 연속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12살이 되는 해 부모가 모두 사망하게 되는데 고아가 된 형제들은 함께 지낼 수 없었다. 만덕은 친척집에 얹혀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친척들의 형편도 좋지 않아 눈칫밥을 먹는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만덕은 기생들이 생활하는 기방에 의탁을 하게 되는데 여기서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기생이라면 갖추어야 할 기예 등, 그 방면의 탁월한 모습을 보이던 만덕은 18세에 기적(기생으로 등록되어 있던 소속, 또는 기생들을 등록해 놓은 대장)에 이름까지 올리게 된다.
특출한 재주로 제주의 이름난 기생이 된 만덕은 심정에 어떤 변화로 인해 23세가 되던 해에 관아를 찾아 기적의 자신의 이름을 삭제하기를 요구한다. 당시 기녀는 기본적으로 관아에 소속된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다. 일반 백성은 가정을 꾸릴 수 있고 거기에 이동의 자유가 있었다.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던 자유가 있었지만, 기생은 어느 한 곳도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여러 차례 관아를 찾아 민원을 올린 끝에 결국 기적에서 이름을 지우게 된 만덕은 '기생 만덕'이 아닌, '인간 만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사업가의 길
만덕이 살았던 조선 후기는 세 가지의 경제적인 변화가 생긴다. '모내기법의 확산', '대동법의 시행',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이 세 가지는 조선 후기에 초기 자본주의적 경제 모습이 나타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들이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돈만 있으면 무엇으든 가능한 것이었고, 이런 상황은 만덕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도시와 시장이 발달하게 되는데, 조선은 조금 독특한 지형조건으로 인해 해상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었다. 큰 강을 중심으로 한 '수로', 바닷길을 중심으로 한 '해로'가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고 배가 쉽게 머물렀다 나갈 수 있는 곳들이 주요한 시장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제주 포구에서 조그마한 상점으로 시작한 만덕은 33년 동안 제주 제일의 객주로 발돋움하게 된다.
제주의 기근
1793년 제주도에는 큰 기근이 온다. 1794년 겨울의 제주 인구는 62,698구였다가 다음 해 겨울에는 47,735구로 급감하게 되는데 일년 사이에 인구의 30% 정도가 먹지 못해 죽은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진휼곡(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춘궁기에 종곡을 나누어 주고 추수기에 거두에들이던 곡식)을 배에 실어 제주로 보내지만 11,000석의 진휼곡은 배가 침몰하면서 없어져 버린다.
이때 김만덕은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300섬의 쌀을 마련하고 이를 제주로 옮겨 관아에 쾌척하였다. 이로인해 제주도민들의 식량 사정은 한결 나아질 수 있었고, 관아에서도 만덕의 기부에 대해 조정에 보고를 올린다. 만덕의 행동은 조정에서도 큰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쌀 300섬?
쌀 1섬은 대략 80kg 정도이며, 요즘 산지의 시세로 13만원에 약간 못 미친다. 13만원으로 계산하면 300섬은 3천 9백만 원 정도 되는 것이다. 당시 제주도의 쌀 흉년은 3년간 지속된 상태였다. 원가의 세배, 네배 수준까지 올랐을 것을 생각하면 만덕이 기부한 금액은 약 2억 원이라는 얘기가 된다. 거기에 운송료도 직접 부담하여 육지에서 가지고 왔으니 추가 비용이 더해졌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경제 수준이 지금의 대한민국과 비교하면 1000분의 1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재산이 당시 어마어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금을 알현한 조선 최초의 일반여성
기부를 한 만덕에게 정부는 포상을 내리는데, 이때 만덕은 포상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역으로 제안을 한다.
"서울에 한 번 가서 왕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내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이천봉'을 구경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조정에서는 당연히 고민에 빠졌다. 당시 섬의 여성들의 육지상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기생 출신의 여자인 만덕이 임금에게 제안을 한다는 건 성리학적 유교 질서에 대한 도전이라고까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조의 승락으로 그녀는 육지로 가는 배에 오르게 된다. 평민은 임금을 볼 수 없었기에 정조는 만덕을 '내의원 차비대령행수'로 삼아 자신을 직접 알현할 수 있도록 조치해준다. 차비대령행수라는 직함은 여자간호사 중의 대장이라고 보면 되는데,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명예직을 하사한 것이다.
알현을 마친 만덕은 그 길로 꿈에도 그리던 금강산 유람을 하게 되는데, 정조는 만덕이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지방행정 관서들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해줄 것을 명령한다. 만덕에게 해준 정조의 모든 조치들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금강산 유람을 마친 만덕은 다시 제주도로 돌아가 객주 일을 계속 했으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양아들을 들여 키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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