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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오해와 진실여자 이야기 2021. 6. 3. 17:52반응형
만들어진 이미지 '현모양처'
신사임당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백이면 백' 모두 '현모양처'라 한다. 이것은 신사임당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기에 당연한 일일것이다. 그런데 신사임당이 처음부터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렸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사임당이 살았던 시대에는 예술적 재능이 부각되어 그림과 화가로서 더 유명했다.
'화가 신씨'로 알려졌던 신사임당이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이자 '현모양처'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부터이다. 노론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정신적 지주로 떠받들었던 율곡의 업적을 강화하기 위해 신사임당을 '현모(현명한 어머니)'의 대표 인물로 만들었다. 즉, 신사임당을 현명한 어머니의 대표명사로 만듦으로서 율곡의 훌륭함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때는 식민지배 이데올로기 주입의 일환으로 신사임당이 '군국의 어머니'로 둔갑되었고, 1970년대 박정희 정권 때는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대통령 부인 육영수를 신사임당에 투영시키려는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러면서 '현명한 어머니'의 이미지와 '착한 아내'의 이미지를 덧붙여서 오늘날의 '현모양처'의 이미지가 완성된 것이다.
좋은 부인이 아니었다?
신사임당과 그의 남편 이원수의 관계를 보면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부부관계와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신사임당은 남편에게 사대부로써 갖추어야 할 태도부터 학문적 교화에 이르기까지 스승의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관계로 글공부를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학문적 지식이 깊고 재주가 뛰어난 사임당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부였다. 하지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재주 많고 예쁜 딸을 친정에 두기 위해 몰락한 양반의 자제인 이원수를 택한 것이다. 근본이 있는 양반이지만 상대적으로 기우는 사람이었기에 데릴사위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한편 사임당의 다른 일화에서는 자신이 죽은 뒤에 남편에게 새장가를 들지 말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가 가부장주의 사회였음을 생각해볼 때, 남편에게 자신이 죽은 뒤 재혼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가히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것은 부부관계에 있어 사임당이 매우 높은 주체성을 바탕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려주고, 조선사회의 전통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모계 중심이었던 사임당의 집안
사임당의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흔치 않았던 모계중심의 집안이었다. 사임당 집안의 모계 중심 분위기는 사임당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만 봐도 쉽사리 알 수 있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혼인 후 남편 신명화를 따라 시댁으로 가 시부모를 모셨다. 그러던 중 친정 어머니가 병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댁의 허락을 얻어 친정으로 가서 어머니의 병수발에 전념하게 된다.
그 후 이씨 부인은 신명화에게 자식이 오직 자기 하나뿐인데 늙고 병든 어머니를 뒤로 한 채 떠나기 어렵다며, 각자 자신의 부모를 모시자고 제안한다. 신명화는 이를 받아들였고, 그후로 16년 동안 한양과 강릉에서 각자 살게 되었다.
이렇게 신사임당의 집안은 조선시대와 같은 명명백백한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외가를 중심으로 친정과의 유대가 매우 강했던 특이한 집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사임당이 혼인 후 곧장 시댁으로 가지 않고 강릉에서 머물며 자식들을 낳아 키운 것이 너무나도 자연그러운 상황이었다. 신사임당은 친정의 영향력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친정의 지원 하에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훌륭한 교육자 신사임당
신사임당은 자녀교육에 있어 몸소 실천하며 가르침에 엄격했다. 특히 아들과 딸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 전기 자녀교육은 유교적 가치관 중심의 교육이었고, 특히 여성교육은 공식적인 교육기관이 없는 상태에서 학문은 제외하고 오직 집안 일과 관련된 내용이나 유교정신을 나타내는 정신적인 측면만 강조되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은 남녀에 차별 없이 교육을 하였으며, 자녀들이 예술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무척 진취적인 것이었다.
또한 사임당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녀들을 교육시켰는데, 자녀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항상 겸손하면서도 무심코 하는 행동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윗사람에게 아름다운 행실이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모두 본받으리라'라는 신념으로 몸가짐과 태도를 바르게 하고 행동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임당은 성리학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 속에서 자녀들로 하여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예술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전인교육(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자질을 전면적 · 조화적으로 육성하려는 교육)을 실천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사임당이 실천한 창의적인 사고의 틀을 제공하려는 교육과 말보다는 행동으로 자녀들을 훈육시키려는 교육관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남보다 먼저 사물이나 세상일을 깨달은 사람)로서의 교육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율곡이이나 매창과 같은 훌륭한 인물을 길러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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