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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부끄러운 전쟁 '아편전쟁'
    역사 이야기 2022. 6. 6.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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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C%A0%9C1%EC%B0%A8_%EC%95%84%ED%8E%B8_%EC%A0%84%EC%9F%81

     

    1839년 9월

     1839년 9월 4일 정오 무렵, 중국 광동성 주룽. 영국측이 중국에 서신을 보냈다. '영국 함정에 식량과 물 공급을 재개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중국은 가볍게 물리쳤다. 명분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술 취한 영국 수병의 중국인 농부 살해 사건. 광둥 흠차대신 린쩌쉬는 영국 해군에 대한 식량과 물 공급을 끊고 살해 용의자를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영구은 중국의 요구를 거부한 채 오히려 협박에 나섰다. 영국은 급기야 무력을 썼고 제1차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7476470&memberNo=29566044

     

    영국의 큰 영향력을 끼친 중국의 차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실론에서도 차가 생산되었지만 당시에는 중국차가 '갑'이었다. 1662년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루투칼의 캐서린 공주가 차를 가져오면서 영국에 알려진 중국차는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과 함께 귀족사회의 고품격 문화생활로 급속히 퍼졌다. 영국 상인들이 찻잎으로 한 해 청나라에 지불하는 은이 한때 2만8000톤에 달했다. 약 100년 가까이 영국 은만 청나라로 계속 흘러들어가는 형국이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264925#home

     

    은 대신 아편을 수출한 영국

     중국에서 수입하는 차의 양은 해마다 늘었지만 중국에 수출할 마땅한 품목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중국 상인들에게 몰래 팔고 이를 감시하는 관리들에게는 뇌물을 상납했다. 차를 영국으로 가져가며 은으로 결제하는 대신 아편으로 대체하고 아편 밀무역이 성행하게 되면서 오히려 중국의 은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손실을 넘어 아편에 중독되어 죽거나 폐인이 되는 중국인이 거리에 넘쳤다.

     

    https://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308600

     

    흠차대신 린쩌쉬

      린쩌쉬는 외국 상인들이 숨겨둔 아편을 압수하며 1상자에 5근의 차로 보상해줬다. 앞으로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외국 상인들에게 받았다. 미국과 포르투칼 등의 상인들은 순순히 협조했지만 영국 상인들은 서약서 제출을 거부하고 광저우를 떠나 마카오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 와중에 1839년 7월 7일 술에 취한 영국군이 중국 농부를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린쩌쉬는 범인 인도를 요구했지만 찰스 엘리엇은 거부했다. 마카오를 봉쇄한 린쩌쉬의 함대와 영국 함대가 9월 4일 격돌하며 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http://www.hanhodaily.com/news/articleView.html?idxno=42168

     

    아편전쟁 이후

     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맺은 난징조약은 청의 몰락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이 조약에서 청은 영국에서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를 물어야 했고,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는 치욕까지 겪었다.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굴욕적으로 개항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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