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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6.25 전쟁
    역사 이야기 2022. 6. 28.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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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koreahiti.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7

     

    1950년 6월 25일 새벽

     1950년 6월 25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고, 북한군 기동부대는 서해와 내륙에서, 유격대와 육전대는 강원도와 동해안 지역에서 남하하였다. 북한군의 주력부대인 제1군단은 서울로, 제2군단은 춘천과 강릉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당시 한국군은 오랫동안 비상경계령이 불과 하루 전인 24일에 해제되었고, 주말을 맞이해 많은 병력이 외출·외박을 나갔기 때문에 부대에 남아 있는 병력이 많지 않았다. 소련제 T34전차와 SU76자주포로 무장한 북한군에 비해 한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와 자주포도 갖지 못한 상황이었다.

     

    https://hwiki.eumstory.co.kr/index.php/6.25_%EC%A0%84%EC%9F%81_%EC%9D%B4%ED%9B%84_%EC%9D%B8%EB%AA%85,%EA%B2%BD%EC%A0%9C%EC%A0%81_%ED%94%BC%ED%95%B4

     

    다시 되찾은 서울

     한국군과 UN군은 낙동강까지 후퇴하였다. 한국군과 연합군은 개전 한 달여 만인 8월 1일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다. 한국군과 UN군은 북한군의 집중 공격을 받은 마산·대구·경주 축선을 고수하며 부산을 근거지로 전세를 전환할 수 있게 기회를 기다렸다. 북한군의 남침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위기를 넘긴 UN군은 9월 15일 새벽 인천상륙적전을 단행하고 대반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마련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미 제10군단은 9월 18일부터 서울을 향해 진격, 전쟁 발발 3개월 만인 9월 27일 연합군은 서울을 탈환하였다.

     

    https://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7320

     

    중국과 소련의 가세

     연합군의 공세로 거의 괴멸 상태에 놓인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스탈린은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 휘하의 소련 극동군 소속 50만 병력의 투입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미국 등 연합군과의 확전을 우려한 스탈린은 직접적 참전을 회피하는 대신, 중국의 참전을 독려하였다.

     1950년 연말부터 중국군은 대공세를 전개하였고 연합군과 한국군은 38선과 수도권 북부를 포기하고 한강 이남에서의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 대거 후퇴하였다. 이로써 1951년 1월 4일 중국군과 북한군이 다시 서울을 점령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은 미국 수뇌부가 연합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고 한국 정부요인과 군경 및 가족 약 100만 명을 제주도, 또는 사태가 더욱 심각할 경우 태평양의 외딴 섬으로 이전시킨다는 계획까지 검토할 만큼 긴박하였다.

     

    http://www.prolog.kr/news/articleView.html?idxno=409

     

    교착

     UN군은 몇 차례에 걸친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를 격퇴시켰으나 완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며, 공산군도 그동안 전투에서의 손실로 더 이상 승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이런 가운데 북진과 확전을 주장했던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되고, 지휘관이 교체됨에 따라 전쟁 자체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전선이 1년 만에 다시 38도선 부근에서 교착되자 양측은 군사적인 작전이라기보다 정치적 논리에 의한 휴전을 위한 작전을 검토하게 되었다.

     

    https://blog.daum.net/gmania65/1410

     

    휴전

     휴전회담의 주요 쟁점은 휴전 이후 협상을 하자는 UN 측과 협상 이후 휴전을 하자는 공산 측과의 공방, 군사분계선을 38도선으로 하느냐, 북한 내 비행장 복구문제에 관한 설전, 전쟁포로 처리문제 등이었다. 이 가운데 전쟁포로 처리문제는 최대의 쟁점이었다.

     마침내 휴전회담 개시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서명자는 제3대 UN사령관 마크 클라크, 북한인민군 총사령관 김일성, 그리고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였다.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세계 역사상 가장 긴 휴전회담이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B%B0%98%EB%8F%84_%EB%B6%84%EB%8B%A8

     

    6.25 전쟁의 배경 및 원인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에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룩한다는 조건부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하였고, 그 통치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국 외상은 그 해 12월에 모스크바에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 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을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령히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으로 돌아섬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났다.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국과 소련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의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 무대에 노출되었다.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006241520000007

     

    피해자는 한국 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남북 양측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한반도 전국토가 피폐화 되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 결의에 따라 미국과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터키, 콜롬비아 등 21개국이 참전하여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타지에서 피를 흘렸다. 물자 및 재정 지원까지 합치면 39개국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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