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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감추고 싶어하는 '천안문 사태'역사 이야기 2022. 7. 14. 12:19반응형
정부를 거부하기 시작한 사람들
1980년대 중국은 경제개혁과 시장경제 도입 덕분에 생활수준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경제발전 뿐만 아니라 정치변화에 대해서도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반정부 시위대는 사상도, 의견도, 희망도 매우 다양하였다. 자유주의 경향도 있엇고, 권위주의 경향도 있었다, 심지어 극좌익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모두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모든 정치생활을 통제하는 체제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1989년 6월
1989년 봄 북경에서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는 갈수록 규모가 커졌고, 지지도 높아졌다. 반공산당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한 1989년 5월, 천안문광장에 모인 사람은 거의 100만명 정도였다.
1989년 6월 초, 중국군대는 천안문광장을 포위하고 시위대에게 해산을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발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위대 대부분은 압박에 굴복해서 광장을 떠났지만, 10만명 정도는 끝까지 남아있었다. 이들은 거의 모두 청년학생들이며 핵심은 중국 최고 대학인 북경대학 학생들이었다. 6월 4일 새벽 중국군대는 진압을 개시했다.
그 날의 비극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민주화를 시작한다면 중국이 큰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 1989년 중국에서 민주화 혁명이 생겼다면, 공산당 산부 대부분은 권력과 특권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절대 환영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무력진랍을 결정했다.
군대는 광장에 진입하고, 사람들을 마구 때린 다음에 총을 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탱크까지 들어가고, 싸우는 시위대 뿐만 아니라, 광장에서 도망치는 사람들도 사살하기 시작했다. 북경 중심부는 결국 피가 철철 흐르는 도살장이 되었다.
알려주지 않는 진실
중국 포털 바이두에서 천안문 사태를 검색하면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 사망 후 당국이 애도 행위를 금지하자 격분한 시민들이 그해 4월 4일 천안문 광장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인 일이라고 나온다. 1989년 중국 정부가 정치 개혁,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대학생과 노동자들을 군을 동원해 유혈 진압하면서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학겨에서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90년대 이후 태어난 젋은 세대는 천안문 사태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건 그 이후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 사건으로 중국사람들이 배운 것은 공산당은 정부에 도전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능력과 의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백명이나 수천 명을 학살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도 경제개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등소평과 중국 지도부가 잘 알았던 곳은, 힘과 공포로 오랫동안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국은 정치부문에서 독재국가이지만, 경제에서 개혁개방을 하고 빛나는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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