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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동차왕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 운동
    역사 이야기 2021. 12. 17.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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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274

     

    모든 청년들의 우상이었던 헨리포드

      자동차 왕으로 불리는 핸리 포드는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포드의 창업자로 컨베이어 벨트 조립 라인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을 확립하였다. 이를 통해 자동차의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고 이제는 누구나 자동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그의 손길은 자동차 분야에만 닿은 게 아니다. 세계 최대 산업복합체를 꿈꾼 포드 제국의 영토는 광활했다. 포드 이름을 딴 제철소에선 자체 소유 광산에서 캐낸 철광석을 녹여 자동차용 철강을 생산했다. 

     그의 화려한 이력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대목은 '신문 발행인'이다. 디트로이트 근방의 작은 마을 디어본 태생인 포드는 1920년 고향 이름을 딴 <디어본 인디펜던트>란 주간신문을 인수했다. 당대 최고 기업가 반열에 오른 포드는 이 '개인 미디어'를 무기 삼아 자신의 확고한 철학을 세상에 쏟아낸다.

     

    https://namu.wiki/w/%EB%B0%98%EC%9C%A0%EB%8C%80%EC%A3%BC%EC%9D%98

     

    반유대주의 운동

     1920년 5월 22일 포드의 주간신문인 <디어본 인디펜던트>가 갑자기 신문 형식을 바꾸고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미국은 토착주의(이질 문화의 침입을 방어하자는 국수주의의 일종)와 인종적 편견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격렬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날로 증가하였고, 1915년에 있었던 애틀랜타의 사업가인 레오 프랭크에 대한 린치 사건으로 반유대주의가 뚜렸해졌다.

     

    https://ko.wikipedia.org/wiki/%EA%B5%AD%EC%A0%9C%EC%9C%A0%EB%8C%80%EC%9D%B8

     

    국제 유대인

     헨리 포드는 4건의 반유대주의 소책자를 찍어냈다. <디어본 인디펜던트> 신문에는 <시온 의정서>에 대한 91개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 중에서 20개 이상의 기사가 그 소책자에 실렸다. 《국제유대인》이라는 책 한 권 분량의 기사 모음도 있었다. 이 신문의 유대인 비난은 1922년부터 1924년 사이에 더욱 잦아졌다. 이 시기에 포드의 반유대주의 간행물들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국제유대인》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반유대주의자들에 의해 전파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 중 한명이었던 헨리 포드의 《국제유대인》은 많은 독자들에게 영향을 주게된다.

     《국제유대인》은 포드가 엄청나게 인기가 있던 독일에서 가장 적극적인 독자를 찾았다. 포드의 자서전은 독일에서 발매되자마자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국제유대인》은 반유대주의 운동의 바이블이 되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966

     

    히틀러와 헨리 포드

     포드의 책은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나치는 독일의 반유대인 선전활동에 《국제유대인》 축약판을 사용했고, 그 책은 독일 청년들의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히틀러는 포드를 전우로 간주했다. 뮌헨 나치 중앙당사 집무실의 책상 옆 벽에는, 포드의 실물 크기 초상화를 걸어놓았다. 히틀러는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포드를 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내세우고 격찬했다. 

     1938년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포드의 78세 생일 때, 나치 독일이 외국인들에게 수여하는 최고 훈장인 독일 독수리십자훈장까지 받았다. 포드의 사무실에서 열린 이 수여식에서 클리블랜드와 디트로이트의 독일 영사 칼 카프와 프리츠 하일러가 이 나치 메달을 그에게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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