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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 02 : 나혜석
    여자 이야기 2022. 4. 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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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brunch.co.kr/@ewhaindependent/72

     

    멈추지 않는 목소리

     나혜석은 전 생애에 걸쳐 한국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전통적인 여성의복의 실용성을 비판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하고, 여성의 위생과 자아상을 고려한 디자인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 육아의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다고 인식되던 시대에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남편을 비판하는 '어머니 된 감상기'를 과감하게 발표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혜석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의 관습에 따라 하는 것뿐이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나혜석은 기존 한국 문화의 틀 안에서 독립성과 개성이 인정받기를 바랐다.

     

    https://topclass.chosun.com/mobile/board/view.asp?catecode=&tnu=202012100024#_enliple

     

    불륜

     나혜석은 독립운동을 했다. 남편의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서 상하이에서 만든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프랑스 유학 도중에 최린과의 불륜으로 인해서 남편 김우영과 이론을 하게 된다. 김우영도 당시 다른 여자와 서울에 살림까지 차린 상황이었지만 이 당시에는 오직 여성에게만 간통죄에 대해 처벌했기 때문에 간통죄는 여성인 나혜석에게만 성립됐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magicpink30&logNo=221532059583

     

    이혼고백장

     이혼 후 나혜석은 이혼 과정에서 있었던 사회 불평등한 내용을 담은 「이혼고백장」을 발표했지만 그녀만 비난을 받았다. 이로 인해서 나혜석은 화가이자 작가로서 사회적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혜석은 급진적인 정조론을 가지고 "정조란 도덕도, 법률도 아닌 취미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여성도 누군가의 아내이고 어미이기 이전에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이것은 정조가 육체적인 순결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 취향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2785307#home

     

    세상의 비난

     불행히도 나혜석의 주장은 당시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혼전 성관계는 금기시되는 주제였으며, 여성이 자신의 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큰 수치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나혜석의 그림, 수필, 소설을 외면당했고,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해져서 말년에는 사찰에서 받은 도움으로 생계를 겨우 해결해야 할 정도였다. 나혜석은 1948년 12월 10일 행려 병자를 위한 병원에서 가난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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