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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가 아닌 과거로 후퇴한 이란의 '이슬람 혁명'
    역사 이야기 2024. 8. 2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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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라비 왕조

     팔라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37년간 이란의 샤(국왕)로 군림하는 동안 서구화 및 경제 성장을 꿈꿨으며, 이슬람 이전 시대 이란의 고대 역사에 대한 국민적인 자부심을 심어주고자 애썼다. 그가 통치하던 1960년대 이란 여성들은 투표권을 인정받는 등 남성과 비교적 동등한 권리를 누렸다. 당시 수도 테헤란은 나이트클럽과 카바레가 있는 파티의 도시로 유명했으며, 이런에서 생산한 와인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팔라비 왕조는 사회적 자유를 이끌긴 했지만 국왕의 통치 스타일이 독재에 가까웠으며 민주주의를 억압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특히 시아파 성직자들은 국왕이 이슬람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거득 목소리를 높였다.

     

     

    서서히 다가온 혁명의 기류

     1978년 중반까지만 해도 이란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상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막상 혁명이 일어나자 좌파 지식인, 민족주의자 세속주의자, 이슬람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국왕에 반대하며 일어난 시위는 좀 더 종교적인 측명에서 자신들의 요구를 구체화하게 됐다. 그렇게 1년쯤 지나자 이란 거리에선 이슬람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호메이니는 아주 능숙하게 자신을 다양한 의견을 통합하는 이슬람주의 정부를 이끄는 지도자로 포장했다. 수맥만 이란 시민들은 그를 코란에 나온 약속된 이슬람 사회로 변화시키려는 신성한 인물이라 생각하며 존경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뜻의 '이맘'이라는 호칭도 얻는다.

     

     

    이란을 뒤집어 버린 이슬람 혁명

     세기적인 사건이었다. 20세기형 혁명과 일선을 긋는 21세기형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백년, 반체체 이념을 대표했던 사회주의도 , 민주주의도 내세우지 않았다. '이슬람 혁명'이었다. 진보가 아니라 복고를 앞세웠다. 세계사 최초로 이슬람 문명과 공화정치를 결합시킨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선 것이다. 이로써 2500년 동안 지속된 페르시아의 군주정이 막을 내리게 된다. 샤가 '지배'하는 왕국이 아니라, 이슬람 율법합자들이 '지도'하는 민국이 수립된 것이다.

     

     

    호메이니는 누구인가

     호메이니는 1900년에 태어났다. 1950년대 후반 '아야톨라'라는 칭호를 받아 존경하는 지도자가 됐다. 아야톨라는 이슬람교 시아파 최고지도자를 뜻하는데, 이란은 국민 대부분이 시아파여서 그의 영향력은 무척 컸다. 호메이니는 1964년 추방돼 외국을 떠도는 가운데서도 팔라비 왕조 타도 운동을 이끌었다. 1978년 12월 전국에서 시위가 벌어져 팔레비 2세가 이듬해 1월 이란을 떠났고 호메이니의 귀국으로 이어졌다.

     호메이니는 대통령보다 높은 최고지도자로 이란을 다스렸다. 그 자신은 청렴했지만 이슬람 율법을 지나치게 엄격히 적용해 이란의 발전을 가로막는 과오를 저질렀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제한됐고, 여성은 다시 베일을 쓰는 등 인권을 억압받았다. 핵무기 개발을 지시한 것도 호메이니였다. 호메이니는 1989년 6월4일 88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혁명 이후에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후 이란 정부는 모든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베일과 헐렁한 옷으로 온몸을 가리도록 복장 규정을 의무화했다. 도덕경찰 '가쉬테 에르셔드'가 있어 여성의 복장 단속과 적절한 의복을 착용하도록 지도했다. 도덕경찰은 여성의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보이는지, 바지와 겉옷이 너무 짧거나 꽉 끼는지 화장이 너무 짙은지 검사하였다.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은 식당 출입이 금지되며 만약 이를 위반하면 당사자는 물론 식당 주인도 이를 방조했다는 이유로 영업정지 등 문책을 받았다.

     이란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던 여성 가수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사라져버렸다. 이란에서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금지된 것이다. 이슬람 학명 전후로 수많은 이란의 여자 가수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은 탄압을 피해 해외로 망명하였고, 이란 국내에 머물렀던 여자 가수들은 다시는 무대 위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특히 여성 솔로 가수의 목소리는 성적 자극을 주는 '위험한 금기'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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