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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극심한 식량난과 뼛가루 빵 '1590년 파리포위전'
    역사 이야기 2024. 3. 1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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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시작

     1590년 파리 포위전은 프랑스 종교전쟁의 일환으로 발생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카톨릭과 개신교도인 위그노 사이의 깊은 종교적, 정치적 갈등에 휩싸여 있었다. 가톨릭 진형의 중심지였던 파리는 개신교도인 나바르 왕 앙리가 국왕으러 등극하려는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 포위되었다. 이는 가톨릭 연먕과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파리 시민들이 개신교도인 앙리의 왕위 계승을 거부하면서 시작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99%EB%A6%AC_4%EC%84%B8_%28%ED%94%84%EB%9E%91%EC%8A%A4%29

     

    전쟁의 원인은 무엇?

    1589년 앙리 3세가 앙리 드 기즈를 암살한 뒤 자신도 자크클레망에 의해 암살되면서 프랑스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앙리 3세의 사망으로 나바르의 앙리(후에 앙리 4세)가 합법적인 후계자가 되었으나, 그가 개신교도 라는 사실 때문에 가톨릭 진형에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이로 인해 가톨릭 연맹과 그들의 스페인 지원군은 앙리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파리를 포위하는 극단적인 조취를 취하게 된다.

     

    https://ko.wikipedia.org/wiki/%ED%8C%8C%EB%A6%AC%EC%9D%98_%EC%97%AD%EC%82%AC

     

    파리의 극심한 식량난

    앙리 4세에 의한 파리의 봉쇄는 외부로부터의 식량 공급을 완전히 차단했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이어졌다.이로 인해 시장에서는 식량 가격이 급등했고, 많은 시민들이 하루하루를 굶주림 속에서 보내게 된다. 

     식량난이 지속되면서, 파리 시민들은 극단적인 생존 방법까지 모색하기 이르게 된다. 시민들은 뒤, 개 고양이와 같은 동물을 잡아먹었으며, 심지어 동물원의 동물까지고 식량으로 사용한다. 나중에 되어서는 공원과 정원의 잔디, 나무 껍지, 심지어 가죽 제품을 끓여 먹는 등의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파리 시민들의 질병과 사망률을 증가시켰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한다.

     

     

    마담 몽팡시에의 빵

     이때 즈음 '마담 몽팡시에의 빵'이라는 음식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이를 시 의회에 6월 15일에 제안한 사람은 스페인 대사 멘도사로 1570년대에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군사들이 굶주릴 때 쓴 방법이라 하였다. 그가 말한 방법은 바로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이들의 뼈를 갈아 물과 섞어 빵처럼 만드는 것이었다. 시 의회에서는 아무도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정말로 이 '빵'을 먹기 시작한 건 8월이었다.

     마담 몽팡시에의 빵이라 불린 이유는 마담 몽팡시에가 이 빵을 홍보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그녀는 이를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더는 먹을 게 없던 사람들은 공종묘지를 파헤치기 시작했고 이를 빵으로 만들어내려 했다. 하지만 식인인 점을 떠나 생각하더라도 뼛가루는 영양분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뼉가루 빵을 먹은 사람들은 금방 죽어나갔다.

     

    https://www.mycelebs.com/art/%ED%94%84%EB%9E%91%EC%8A%A4%EC%99%80%20%EB%82%98%EB%B0%94%EB%A5%B4%EC%9D%98%20%EC%99%95%20%EC%95%99%EB%A6%AC%204%EC%84%B8-167478

     

    결국 개종을 택한 앙리4세

     파리 포위전은 결국 앙리 4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종료되었다. 그의 유명한 말, "파리는 미사 한 번 치르는 가치가 있다"는 이 결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앙리의 개종은 가톨릭 연맹의 저항을 약화시켰고, 포위를 해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594년, 앙리 4세는 파리에 입성하여 프랑스의 왕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포위전의 종료는 프랑스 내의 종교적 긴장을 완화시키는 첫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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