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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노트] 홀 - 편혜영책 이야기 2021. 7. 27. 17:27반응형
사람들은 오기에게 부모에 대해 말할 때면 조심스럽게 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기가 어려서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었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가급적 부모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고 어쩌다 얘기가 나오면 상처를 들춰낸 것을 정중히 사과했다. 그럴 때면 오기는 기분이 상했다. 이유 없이 자신을 따돌리던 아이들을 상대할 때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그들은 모두 오기에게 부모가 없는 게 결격임을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의식했다. 오기가 결락감을 느끼기를 강요했다.
즉 사십대는 권력이나 박탈감, 분노 때문에 쉽게 죄를 지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오만해서 손쉽게 악행을 저지른다. 분노나 박탈감은 곧잘 자존감을 건드리고 비굴함을 느끼게 하고 참을성을 빼앗고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의감으로 포장하게 만든다. 힘을 악용하는 경우라면 속물일 테고 분노 때문이라면 잉여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대는 이전까지의 삶의 결과를 보여주는 시기였다. 또한 이후의 삶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다. 영영 속물로 살지, 잉여로 남을지.
아내는 그럴 때가 있었다. 꼬투리를 잡아 뭐든 최악의 일을 상상하고, 그일이 실제로 일어날 확률을 과장했다. 그럴 때의 아내는 몹시 날카롭고 신경질적이었다. 자신의 생각만 믿었고 그걸을 진실로 확신했다.
오기가 생각하기에 아내의 불행은 그것이었다. 늘 누군가처럼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언제나 그것을 중도에 포기해버린다는 것.
오기의 몸은 거짓말과 변명과 오해를 굳건히 버텨내고 있었다. 몸은 괜찮았지만 기분은 나빴다. 오기는 이미 큰 사고를 겪었고, 그것으로 겪어야 할 고통이 모두 끝인 줄 알았는데, 그 일 이후에도 보통의 삶과 마찬가지로 거짓말과 오해와 변명이 계속된다니, 이상했다.
오기와 장모는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물론 아내가 있었다면 언제든 가족이 아닌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뻔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오기와 장모는 그럴 기회를 잃었다. 영영 가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오기가 유리한 입장인데도 그랬다. 간혹 자신의 성공만으로 성에 차지 않을 때가 있었다. 가까운 누군가의 실패가 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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