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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노트, 마인드맵] 종의 기원 - 정유정
    책 이야기 2021. 11.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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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말이 되게 만들 수 있었다. 말이 되도록 그림을 손보는 건 타고난 재능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거짓말'이라고 평가절하하곤 했지만.

    - p49 -


     비로소, 어머니가 영화관 안에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이유가 이해됐다. 내겐 신나고 짜릿했던 영화가 사실은 찜찜하고 무섭고 슬픈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무서워하고 슬퍼해야 했는지는 여전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 p67 -


     어머니와 이모가 내 삶을 지배해온 사람들이라면, 약은 그들이 내 인생이라는 풀밭에 풀어놓은 뱀이었다. 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번번히 놈에게 발목을 물어뜯기고 주저앉았다.

    - p133 -


     내겐 갈 곳이 없었고, 할 일이 없었다. 해야 할 훈련이 없는 시절 해야 할 공부가 없는 하루를 어떻게 쓰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보고 싶은 영화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술도 마시지 못하고, 밤 9시면 귀가해야 했으니 하룻밤 유희조차 불가능했다. 가끔 어머니가 "넌 만나는 애 없니?"라고 물으면 억장이 무너졌던 이유다. 아무것도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없다는 세상 이치를, 뭐든지 다 아는 어머니만 모르고 있었다.

    - p182 -


     그날 밤, 오뎅과 발맞춰 걷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해독의 실마리를 찾았다. 더하여 내가 무엇에 끌리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겁먹은 것에 끌렸다.

    - p188 -


     확인한 결과, 나는 남자보다 여자가 좋았다. 등 뒤에 대한 육감이 남자보다 두 배로 뛰어나면서 겁은 두 배로 많다는 점에서, 혼자 하는 놀이로 그 이상 짜릿한 것도 없었다. '짜릿함'을 상대편 용어로 번역하면, '두려움'일 테지만.

    - p190 -


     나는 오래오래 그곳에 서 있었다. 춥고, 고요하고, 인적 없는 어둠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있었다. 찰나에 가까웠던 그때, 여자의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전지의 순간을 복기하는 일. 보이지 않는 강물을 내 안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일. 열린 갑문을 통과해 흘러나가는 여자의 몸뚱어리를 상상하는 일.

    - p204 -


     본질적인 상태에서 남과 다른 어떤 부분이 내 특성. 혹은 본성일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식하게 만든다면, 그리하여 삶에 특정한 영향을 끼친다면, 영향력이 커져서 삶을 특정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면······. 문젯거리가 되겠지.

    - p243 -


     

     존재감이나 호감 같은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자성이었다. 다른 사람과 섞이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반응하지도 않으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줄곧 의식하게 만드는 유의 힘이었다.

    - p249 -


     두 여자는 '포식자'를 평생토록 가둘 무형의 감옥을 구상했을 것이다. 무탈하고 무해한 존재로 살 수 있도록, 사람 속에서 살되 사람과 어울려 살지는 않도록. 그 결과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둘 때까지 밤9시면 귀가를 해야 하고, 혼자서는 여행조차 갈 수 없는 어린애로 남게 된 것이다.

    - p267 -


     오로지 인간만 굻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생물이었다. 오만 가지 것을 먹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먹으며, 매일 매 순간 먹는 이야기에 먹는 이야기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먹을 것을 향한 저 광기는 포식포르노와 딱히 다를 바가 없었다.

    - p275 -


     "엄마, 사랑해요."

     작고 나직한 소리였다. 둥지에 홀로 남은 새끼 새의 울음처럼 분명한 의도가 읽혔다. '엄마, 사랑해요'가 아니라 '엄마, 나를 버리지 마세요'로 들렸다. 나눈 숨을 멈췄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분노가 와르르 무너졌다. 나를 지배하던 충동이 일순간에 가라앉았다. 핏줄의 저주에 걸려든 순간이었다.

    - p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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