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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장 용감한 여성 '김학순 할머니'여자 이야기 2021. 10. 29. 07:00반응형
1991년 8월 14일
1991년 8월 14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실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기자회견. 일본군 '위안부' 피해생존자 가운데 이날 처음 공개석상에 나온 고 김학순 할머니가 이같이 말했다. 김 할머니는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하고 한국 여성들을 강제로 동원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렸다. "증거를 대라"는 이들에게 김 할머니는 "살아있는 내가 바로 증거"라고 했다. 김 할머니는 "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은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 하니 말이나 됩니까"라고 했다.
시대가 그랬다
김 할머니가 입을 연 당시는 위안부가 피해자로 인식되지 않던 때였다. '성희롱', '성폭행' 등 성폭행 피해 개념이 막 등장하던 시기였다. 오로지 여성에게 책임을 묻는 '윤락'이라는 단어만 존재했다. 일본의 식민지배 시절 '처녀공출'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으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떠오르지 않았다. 또 위안부 피해생존자들이 살아온 시대는 여성이 강간을 당해도 그 여성의 수치, 가문의 수치가 되던 때였다. 피해자들은 아무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시대의 긴 침묵을 깨고 김 할머니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비의 날개짓 '나비효과'
운동이 전개되면서 할머니들은 단순히 피해자, 생존자, 증언자가 아닌 활동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가해자들이 있는 일본으로 가서 소송도 하고, 증언집회에도 나섰다.
이듬해인 1992년부터 수요시위가 시작됐다. 정부가 그래 신고센터를 만들자 피해 신고가 이어졌다. 할머니들은 일본 증언집회 등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시작했고 사회가 함께 분노하자 할머니들도 바뀌었다. 얼굴을 가리고 사무실로 찾아왔던 할머니들은 당당하게 수요시위에 나와서 "부끄러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가해자인 너희"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의식 변화는 성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틀을 바꿔놓았다.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한국 위안부 피해자 238명을 비롯해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중국, 호주와 네덜란드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앞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이를 계기로 전쟁 중 여성 인권유린 문제에 눈뜬 세계 여론에 굴복한 일본은 1993년 일본군위안부의 존재와 강제성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김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한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제정됐다. 2007년 미 의회의 '위안부 결의안'이나 2010년 시작된 해외 위안부 기림비 설립도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다.
24년 만에 재조명
미 언론 뉴욕타임즈가 지난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여성운동가 고(故) 김학순 할머니의 부고를 다뤘다. 지난 1997년 김 할머니 별세 23년 만이다. 뉴욕타임즈는 2021년 10월 21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자사 부고 시리즈 '더는 간과할 수 없다 : '위안부'에 관해 침묵을 깬 김학순'이라는 기사를 통해 김 할머니의 일생을 소상히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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